2012년 제54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는 스무 살이었다. 역대 최연소. 1992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 박지원씨. 1차 시험(객관식)과 2차 시험(주관식), 3차 시험(면접)을 연달아 단 한 번에 패스했다. 이를 ‘동차’ 합격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박씨는 ‘생동차’였다. 생애 첫 고시 응시에서 동차 합격을 거머쥔 경우를 일컫는다. 비(非)전공자임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인 성취입니다.
–꿈을 빨리 이루셨네요.
“부모님의 꿈이었죠.”
착실한 장녀,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누구나 선망하는 타이틀, 그의 발 빠른 출세는 세간의 호기심을 몰고 다녔다. 억대 연봉을 받는 수재,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뒤늦은 방황이 나이 서른을 지나 찾아왔다. “엄마·아빠가 서울대 가라고 해서 갔고, 사시 보라고 해서 봤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나 이거 왜 하고 있지?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공부 로봇’의 진로 고민
지난해 2월 김앤장에 사표를 냈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통역사가 되려고. 그의 진로 선택이 지난달 서울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공개 보름 만에 조회 수 15만회, 즉각 소셜미디어를 달구더니 책 출간 제의까지 들어왔다. 안주머니에 사표를 품고 다니면서도 ‘출사표’는 늘 미수에 그치고 마는 장삼이사들에게 꽤나 신선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이다. “비슷한 고민을 지닌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 같다”고 했다.
–왜 통역사인가요?
“다들 반응이 비슷해요. 인공지능 시대에 웬…. 세상물정 모른다고.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좋아했거든요. 어렵고 복잡한 말을, 어순도 어감도 다른 외국어를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변환하는 게 멋져 보였어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캐치하는 일. 드디어 적성을 발견한 느낌이에요.”
–부모님 반응은요?
“말씀 안 드렸어요.”
이쯤에서 ‘효녀’ 박지원씨의 어린 시절을 짚고 가도록 하자. 고향 대구에서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모범생, 별명이 동명이인 ‘연암 박지원’이면 말 다 했다. 모친은 교사, 부친은 교수. 학구열이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다. 박씨가 스무 살에 대학 2학년일 수 있었던 건, 양친이 3월생인 딸을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시켰기 때문. “공부, 공부, 공부만이 살길이다, 어려서부터 완전히 세뇌가 됐어요. 위치·서열·인정에 대한 강박이 대단하셨죠.” 딸의 고교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 란에 부모는 ‘판사’를 써넣었답니다.
–반항 안 하셨나요?
“두 분의 목표가 곧 제 목표였어요. ‘공부 로봇’으로 살았죠. 추억이 없어요. 집, 학교, 집, 학교…. 학원도 안 다녔고 집에 TV도 없었어요.”
–그래도 기대에 부응했네요.
“저는 공부가 정말 싫었던 사람이에요. 학창 시절엔 그냥 견뎠어요. 원래 사람은 밥 먹고 나면 공부하러 방에 들어가는 건가 보다…. 근데 사법고시는 달랐죠. 성인이 돼 노는 재미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공부하려니 죽을 맛이었어요. 곧 제도가 폐지된다니 빨리 붙어야 했는데, 과장이 아니라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뺨에서 진물 뚝뚝… 죽기 싫어 공부했다
그해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와 동시에 박씨는 유명 인사가 됐다. 매스컴은 어린 천재의 등장에 열광했다. 그간의 공부량과 포부와 미래의 청사진, 성공이 담보된 인생을 추켜세웠다. 갓 골방을 벗어난 스무 살 여대생은 한 인터뷰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면서도 “‘벤츠 여검사’ 사건을 보면서 청렴한 법조인을 꿈꿨다”고 말했다. 현직 여검사가 내연 관계였던 변호사에게 벤츠 차량 등의 선물과 함께 사건을 청탁받았다는 폭로로 당시 떠들썩했다.
–왜 하필 이 사건을….
“부모님이 시켜서 고시 준비했다고 말하기는 좀…. 신문에서 본 게 생각나서 그럴싸하게 대답했어요.”
그러나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는 고백은 사실이었다. 휴대폰까지 정지시키고, 하루 14~15시간 법전과 씨름했다. “샤워하면서도 공부했어요. 책을 코팅해서 벽에 붙여 놨어요. 1차 시험 막판에는 대구 할머니 댁에 머물렀는데요, 아파트 십몇 층이었는데, 난간에서 매일 울었어요. 걱정을 많이 하셨죠.”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아토피 피부염이 있어요. 스트레스 심해지면 난리가 나요. 하도 긁어대니 아침에 깨보면 침대가 피투성이고…. 오죽하면 손을 묶고 자기도 했죠. 그래도 진물이 뺨을 타고 흘렀어요. 이 끔찍한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1차 합격 통보받기도 전에 신림동 고시촌에 방을 잡았죠. 엄마 면전에서 얘기했어요. 시험 떨어지면 정말로 뛰어내리겠다고.”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다양한 책을 보는 타입은 아니에요. 다만 한 권을 봐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다 봐요. 성격이 그래요. 유튜브조차 ‘스킵’을 안 해요. 1초부터 최후의 1초까지 다 봐요. 사시 2차 때 ‘비상상고(非常上告)’라는 형사소송법 제도에 대한 문제가 나왔는데요, 소위 기출 문제에 잘 안 나오는, 그래서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 대목이거든요. 저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다 보니까 으레 알고 있었죠. 그런 부분에서 이득을 정말로 본 것 같아요.”
◇눈물에도 종류가 있었다
이화여대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박지원씨. 그가 택한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택했으니계속 걸어갈 뿐이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이화여대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박지원씨. 그가 택한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택했으니계속 걸어갈 뿐이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운전면허 실기를 제외하면 시험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판사가 될 수는 없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두 달간 법원 시보를 했어요. 원고 말 들으면 원고 말이 맞는 것 같고, 피고 말 들으면 피고 말이 맞는 것 같고…. 섣불리 판단을 못 하겠더라고요. 검사는 체질상 안 맞았고요. 일단 변호사를 택했죠. 경험부터 쌓자, 돈도 많이 준다 하니.”라고 전했습니다
–일은 잘 맞았나요?
“조세 업무를 주로 했어요. 조선일보 1면에 나오는 기업을 대리하기도 하고, 회장님 전용 엘리베이터도 타봤죠. 신기했어요. 그런데 힘든 기억이 더 많아요. 아무도 ‘야근’이라는 말을 안 쓰는 곳이에요. 야근이 기본이니까요. 매번 백지(白紙) 앞에서 막막했어요. 사실관계를 빠삭히 파악해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게 내 숙명인데, 어떻게 정말로 다 알겠어요. 사람인데.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이게 내 꿈이었다면 극복했겠지만, 아니잖아요. 점점 지쳤죠. 이제는 내 인생 찾고 싶다.”
–돈과 명예로 보상되지 않던가요?
“내적 충족이 안 되면 오래 못 가는 것 같아요.”
–새 꿈을 찾으셨군요.
“외국계 기업 관련 사건을 진행할 일이 있었는데, 프리랜서 통역사 분을 모셨어요. 법률 통역은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되거든요. 2~3시간 동안 엄청나게 긴 문장을 너무도 정확하게 확 쏟아내시는데, 우와, 다음에 태어나면 통역사 해야지.”
기회는 생전에 왔다. 둘째 아들의 출산이 임박했던 2022년. “회사에서 연수를 보내주는 시점이었어요. 교육비 나오니까 아이 낳고 아무 학원이나 다니다가 복직해야겠다.” 검색창에 별생각 없이 ‘광화문 영어 학원’을 입력했다. 근처 통번역 학원이 제일 상단에 보였다. “운명인가?” 곧장 등록했다. 배치 고사를 치르고 4시간 뒤 출산했다. “그 정도로 즉흥적이었어요. 모유 수유하면서도 영어 공부를 했는데, 전혀 힘들지가 않았어요. 살면서 처음이었어요.” 대학원에 원서를 냈고, 그해 연말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