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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정선엽 병장 나이 역 프로필 고향 사망 학력 대학 학교 어머니

RainyDiary 2023. 12. 21. 22:28

'서울의 봄' 정선엽 병장 兄 "동생 면회 신청 불허 뒤 軍 '영안실로…' 연락"
- 2023. 12. 15

 12·12군사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사수하라'는 명령에 충실하다가 신군부 측이 쏜 4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 고(故) 정선엽 병장(사망 당시 23세)의 44번째 기일이 지난 13일 지나갔습니다.

고인은 1000만 관객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속에선 조인범 병장으로 나왔다.


조선대 전기공학과 2학년 때 입대한 고 정선엽 병장은 제대 후 복학해 대학을 마친 뒤 동생 뒷바라지를 하던 형의 권유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답니다.

고인의 형인 정운채 목사는 15일, YTN과 인터뷰에서 동생이 전사한 1979년 12월 13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5남매 중 3째이자 장남인 정 목사는 "저는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며 "정확하게 사건이 일어나기 1주일 전 저한테 전화를 걸어 온 동생에게 제가 '남은 3개월 군 복무 마치고 조선대학교 졸업하면 내가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동생이 '형님 고맙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정 목사는 "그 약속 대화가 동생과 마지막 대화였다"며 애통해했다.

동생 사망소식을 듣게 된 경위에 대해 정 목사는 "당시 서울역 앞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며 "출근길에 삼각지를 지나갈 때 택시 기사님이 '간밤에 육군본부 국방부 부근에 총격전이 심하게 일어났다'고 해 동생이 국방부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가서 면회 신청을 했었다"고 했답니다.

이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면회가 안 된다'고 해 사무실로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국방부에서 '국군통합병원 영안실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동생이 어떻게 전사했는지에 대해선 "당시 경위를 전혀 설명 듣지 못했다"며 "사건이 나자마자 제가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같은 교회 교우인 국방부 군무원을 통해 '다들 투항했는데 정 병장은 끝까지 무기를 빼앗기지 않고 무장 해제를 요청하는 반란군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리자 저쪽에서 총격을 가해서 사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가족에겐 전두환이 원수다"며 "어머니는 사건 이후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고, 일찍 치매가 와 힘들게 사시다가 떠나셨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현재 사역을 위해 미얀마에 머물고 있는 정 목사는 "조선대가 동생에게 명예 졸업장 수여, 조선대학교 내 서울의 봄 촬영지에 정선엽 병장 조형물도 세워주겠다며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모교인 조선대학교가 정선엽 병장 전사를 명예로운 사건으로 인정한다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답니다.

이에 정 목사는 "정말 저희 가족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된다. 조선대학교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서울의 봄' 정선엽 병장 유족 소송... 국가는 '1년치 고통' 주장하며 배상 거부
- 2023. 12. 12

1979년 12월 13일 새벽.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측에 섰던 제1공수여단(반란군)이 군 수뇌부 제압을 위해 국방부 청사에 난입했다. 전역을 3개월 앞둔 '말년 병장' 정선엽(23)은 육군본부 B2 벙커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초병들은 반란군 앞에 투항했지만, 정 병장은 "중대장님 지시 없인 절대 총을 넘겨줄 수 없다"며 버티다 특수부대 총에 맞아 전사했다. 정 병장은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국방부를 지키다 전사한 유일한 희생자였으며, 사태 전체로 확대해 봐도 김오랑 중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함께 반란 진압 중 전사한 유이한 인물이랍니다.

44년 세월이 흘러 반란 주모자 신군부 세력들이 대부분 법의 처벌을 받고, 정 병장의 죽음 역시 '순직'에서 '전사'로 격상(지난해)됐지만, 이 나라는 반란군으로부터 군의 심장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군인정신을 지켰던 유일한 희생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11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 병장 유족들은 정 병장의 사망 경위를 정확히 규명하지 않았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 소송에서 국가는 오히려 '유족에게 위자료를 주면 이중 배상의 우려가 있다'는 논리로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02단독 재판부가 사건을 심리 중이랍니다.

이 소송은 지난해 3월 국방부 산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정 병장 죽음을 검토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위원회는 "반란세력에 대항한 정 병장의 명예로운 죽음을 군이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조작했다"고 결론 내리고 군에 사망 분류 정정을 촉구했다. 같은 해 12월 전사 확인서가 유족에게 전달됐지만 정 병장을 유독 아꼈던 큰형 정훈채(71·선교사)씨는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정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반란의 정점이었던 전두환의 죄목에 초병살해죄(사형 또는 무기징역)가 있었다"며 "국가를 위해 생명을 던진 정선엽의 희생을 전사로만 바꾸면서 끝내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 사건 재판에서 국방부는 "전사자 분류에 따른 배상 체계가 이미 존재하기에, 별도의 위자료 청구는 현행법상 '이중배상 금지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또 "과거 부실수사에 따른 가족의 고통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 손해의 발생일은 진상규명위 결정이 있던 지난해 3월 21일부터"라는 논리도 폈다. 유족들을 대리하는 김정민 변호사는 "정 병장 어머니는 사건 진상도 모른 채 2008년 돌아가셨는데, 국방부 말대로라면 아무런 고통 없이 떠나신 셈이냐"고 꼬집었다.

국방부의 궤변은 12·12 군사반란의 또 다른 희생자 김오랑 중령 유족의 가슴도 할퀴었다. 김 중령은 제3공수여단(반란군)이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할 때, 사령관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김 중령 조카 김영진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국가에 외면받으며 죽음의 경위를 밝히고자 노력했던 유족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정훈채씨에게 동생 선엽씨는 늘 희망이었다. 정씨는 가정형편상 상고를 졸업한 뒤 은행에 근무하며 정 병장 등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형제는 12·12 일주일 전에도 통화를 했다고 한다. 정씨는 정 병장에게 "제대하고 대학 졸업하면 형이 미국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을 무단으로 체포하고 국방부와 특전사령부를 침탈한 신군부의 반란 탓에, 형제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스물셋 한창의 동생을 잃은 정씨는 교회에 몸을 의지해 선교사가 됐고, 전두환 얼굴이 TV에 나올 때마다 분노로 치를 떨던 정 병장의 어머니는 치매를 얻어 세상을 떠났답니다.

정 병장 유족들의 1심 결과에 따라, 김오랑 중령 유족들도 추가 소송을 기대해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초 이달 4일 기일을 끝으로 선고를 앞두고 있었으나, 국가가 변론 재개를 요청하면서 다음 달 15일 추가 기일이 잡혔다. 다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공언했던 국가배상법 개정안(순직 군경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국가배상 소송을 지휘하는 법무부가 진의와 달리 국방부의 '이중배상 금지' 논리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생을 먼저 앞세운 정훈채씨는 1995년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을 때, 이 나라에 대한 기대를 모두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러다 지난해 동생의 전사 결정과 최근 영화 '서울의 봄'에 보여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다시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정씨는 "국가가 죄지은 사람을 벌 주는 게 당연하듯, 의로운 이를 치하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