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최대 강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서민적'인 이미지이다. 확실히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보다는 '비주류' 쪽에 더 가까웠다. 김지사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경주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김지사는 어린 시절부터 유교 전통을 엄하게 지키는 집안에서 옛날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김지사의 아버지 김승헌씨(작고)도 전형적인 유교전통을 신봉하는 가장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청년 시절에는 문중의 추천으로 능참봉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경주 김씨 신라 왕릉을 관리하는 9급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면서기, 광복 후에는 부면장을 지냈다. 이후 공민학교 교사를 했다. 어머니(작고)는 16세에 시집을 와서 7남매를 낳았다. 김지사는 여섯째였고, 아들로는 셋째였다. 아버지가 문중 일에만 신경 쓴 탓에 모든 살림살이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 김지사는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집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교육공무원 생활을 했던 아버지 월급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가던 김지사 집은 그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아버지가 친척에게 보*을 잘못 서는 바람에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아홉 식구가 단칸방 판잣집에서 생활하며 처음으로 가난을 실감했답니다.
영천에서 소문난 영재였던 김지사는 지역 최고의 명문인 경북중과 경북고에 무난히 합격했다(29쪽 상자 기사 참조). 고교 시절 김지사는 '수양동우회'라는 대구 시내 남녀 고등학생 연합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는 동아리 회원들과 경북대에서 자주 토론도 하며 사회의식을 키워나갔다. 고3이던 1969년 김지사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지사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울 친척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상당히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의 생활은 김지사에게 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시골 판잣집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던 열등의식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대학에서 선배 심재권(전 국회의원)이 주도했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일종의 운동권 동아리였다. 1970년 교련 반대 시위를 주동하면서 데모 대열에 합류했던 그는 반일 시위 등 시국 사건과 관련한 학생 데모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답니다.
대학 2년 때인 1971년에는 서울 구로공단에 위치한 한 드레스 미싱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의 영향으로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공장 체험이 이후 김문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해 10월 그는 서울대에서 '제적 조치'되었다. 1973년 복교 조치가 내려졌지만 당시 국내 정치 상황은 최악이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연일 '유신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당시 김지사는 유인태 등과 함께 민청학련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일로 김지사는 기나긴 수배 생활에 들어갔다. 1975년 김지사는 다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그는 대학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고 노동자의 길을 택했다. 그해 서울 개봉동에 있는 한일공업에 입사하면서 그는 노조위원장을 맡는 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형·동생도 김지사 영향 받아 노동운동 투신
1980년 김지사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노동계 정화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어 지냈다. 그가 숨어 지낸 곳이 바로 지금의 아내인 설란영씨 집이었다. 설씨 역시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습니다. 설씨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순천에서 자랐다.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재수 생활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구로공단 공장에 다니던 고교 동창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세진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성격이 활달하고 친화력이나 리더십이 남달랐던 그녀는 20대 여성으로 노조위원장에 올랐답니다.
두 사람은 이 시기, 모두 정화 대상자로 지목되어 노조위원장 자리에서 해고되면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81년 9월26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외동딸 동주가 태어났다. 당시 김지사는 심상정(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과 함께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이끌고 있었다. 1986년 5월 그는 보안사에 체포되었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고문을 경험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6개월 만인 19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1989년 동독의 붕괴와 구 소련의 붕괴는 김지사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1990년 11월 그는 장기표, 이재오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한 이후 노동인권회관을 운영하던 그는 김영삼 정권의 러브콜을 받고 1994년 3월 집권 여당인 민자당에 입당했다. 세상을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한 변신이었답니다.
김문수 지사의 큰형 명수씨는 작고했다. 둘째형 영수씨와 남동생 익수씨는 김지사의 영향을 받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가난한 형편으로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직장 생활을 한 영수씨는 서울신탁은행 노조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익수씨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교도관 시험에 합격해 서울구치소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이후 형 김지사의 영향을 받아 교도관을 그만두고 직장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 지금도 영수씨와 익수씨는 김지사의 선거 때마다 든든한 우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사의 외동딸 동주씨(29)는 지난해 5월 경기도 여주의 한 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동주씨와 캠퍼스 커플(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로 두 사람 다 사회복지사이다. 사돈은 울산이 고향인 평범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김지사가 주변에 청첩장을 일절 돌리지 않아 결혼식은 친지들만 참석한 가운데 소리 소문 없이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답니다.